새마을노래 2절 “초가집도 없애고…”
대구의 영산(靈山)인 팔공산의 염불봉에 오르려면 빈대골을 거쳐야 한다. 빈대골은 염불봉 남쪽에서 발원해 동화천을 이루는 계곡으로, 인근 빈대절터에서 유래됐다. 절에 빈대가 들끓어 불태워 없앴다는 전설에서 생겨난 지명인데, 팔공산 말고도 이와 비슷한 설화가 전국 곳곳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빈대는 농사일로 고달팠던 백성들에게 몹시 성가신 존재였다. 초가는 갈대와 볏짚 등으로 지붕을 엮어서 만든 집으로 웃풍에 강하고 단열도 잘돼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하지만 썩기 쉽고 빈대와 이, 벼룩 같은 해충이 잘 생겨 자주 갈아줘야 하는 불편이 컸다. 1970년대 초 농촌근대화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이 지었다는 ‘새마을노래’에도 초가가 등장한다. 2절은 ‘초가집도 없애고’로 시작하는데, 빈대 낀 초가에 살던 민초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빈대가 한민족의 가난을 대변하는 벌레라 해도 서민 음식인 빈대떡과도 연관성이 있다고 봐야 할까? 학계에서 빈대떡은 그 어원과 유래를 두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빈자'(貧者), 손님 대접을 뜻하는 ‘빈대(賓對)’가 어원이라는 설과 조선시대 녹두를 갈아 기름에 부친 중국의 ‘빙쟈'(餠子) 떡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이들 중 가난을 표현하는 ‘빈자’ 설이 유력해 보인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는 후렴구로 유명한 1943년 가수 한복남이 부른 ‘빈대떡 신사’ 가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빈대떡의 유래가 어찌 됐든 빈대는 가난을 상징하고도 남는 것 같다.
일부에선 빈대떡이 서울 덕수궁 정동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해방 전 정동에 빈대가 많았고, 여기서 많은 상인이 부침개를 판 데서 비롯됐다는 것인데, 그럴듯하게 지어낸 말로 보인다. 일단 정동이란 동네명부터 빈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정동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의붓아들 태종에 의해 파헤쳐져 도성 밖으로 이장된 뒤에 생겨난 이름이다. 아름답고 깨끗한 궁궐이 있고 구한말 신식 외국 대사관들이 앞다퉈 들어선 곳이 빈대 투성이였을 것으론 보이지 않는다.
새마을운동의 열풍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빈대가 다시 돌아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정부 합동대책본부에 따르면 지난 6일까지 전국 17개 시도 등에 접수된 빈대 의심 신고 건수는 30여건이다.
외국인 관광객을 통해 국내에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빈대 확산을 저지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 기온이 높아지면 빈대가 많아지는데 불행 중 다행인지 몰라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찢어지는 가난 속 빈대와 싸웠던 삶이 ‘뉴노멀’이 되지 않도록 국민 각자가 서둘러 예방에 나서야 하겠다.
요즘 빈대는 살충제 내성까지 생겨 최악의 경우 팔공산 빈대절터처럼 불을 질러 태워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빈대의 무서운 확산 속도를 볼 때 어쩌면 지금이 골든타임일지도 모른다.
김복두 itn@itn.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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