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병 치료시설 세우고 헌신한 초기 선교사의 생생한 기록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중략)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손양원 목사의 ‘감사의 기도’ 중에서)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을 조명하고자 기획한 답사의 하나로 24일 찾아간 전남 여수시 율촌면 소재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에는 현대사의 비극을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목회자의 숭고한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76년이 지나도록 후대의 마음을 울리는 주인공은 손양원(1902∼1950) 목사다. 장남 손동인과 차남 손동신이 이른바 여순사건 때 좌익 계열 학생인 안재선(∼1979)의 총을 맞고 숨진 뒤 손 목사가 장례에서 올렸다는 ‘감사의 기도’를 기념관 앞마당 순교자 기념비와 전시관 내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재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 일대를 점령하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된 일련의 사건이다. 혼란 속에 이념 대립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사건 당시 손동인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좌익계열 학생들에게 친미·반동주의자로 몰렸다고 한다. 형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달려온 동생과 함께 희생됐다.
놀랍게도 손 목사는 두 아들이 순교했다며 감사하는 헌금을 했다. 기념관에서 헌금 봉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순교의 두 아달(아들)이나 주신 감사의 봉헌금”, “순교 2자(子)의 부 손양원”이라고 적혀 있다.
애양원교회 송영오 장로는 헌금액이 현재 가치로 대략 수천만원 정도일 것이라면서 “(장남 손동인의) 유학 자금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말했다.
손 목사는 슬픔을 딛고 상상을 초월하는 결단을 내린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오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안재선을 위해 기도하고 그를 양아들로 삼기로 결심한 것이다.
실제로 국군에게 붙잡혀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안재선을 살리기 위해 순천에서 활동하는 나덕환 목사를 통해 구명 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목숨을 부지한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아 함께 살았다. 손 목사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9월 28일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한다.
안재선은 잘못을 뉘우치고 장차 목사가 되길 원했던 손 목사의 바람에 따라 한때 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죄책감 때문인지 중도 포기하고 나중에 사업 등을 하다 1979년 생을 마감한다. 다만 그의 아들이 부친의 유언에 따라 목사가 됐다고 한다.
송 장로는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 용서, 화해를 가장 강조하셨던 분”이라며 “손 목사님을 통해서 화합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근처에 있는 애양원역사박물관에는 미국 남(南) 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돼 한국 최초의 한센병원을 설립한 포사이스(포사이드·포사이트) 선교사 등 근현대 한국 의료에 기여한 이들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포사이스 선교사는 1909년 목포에서 광주로 향하던 중 길가에 쓰러진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것을 계기로 남 장로교의 지원을 받아 광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치료소를 설립했다. 포사이스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한센병이라는 질병과 위협 그리고 사회적 편견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활동한 흔적들을 이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센병 환자 치료시설은 초기에 광주에 있다가 이후 순천으로 옮겨왔으며 통상 애양원이라고 불렸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를 격리하도록 하는 규제가 없어진 후에는 한동안 양로원으로 활용됐다. 현재는 옛 의료 기구나 의료진·환자들의 모습을 알리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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