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수, 타의 추종 불허하는 에너지·아우라 가진 배우”
“고전엔 인간 본질 직시하는 지혜 담겨…거울처럼 계속 들여다봐야”
“파우스트는 이번 공연이 1부에요. 앞으로 2부, 3부까지 해볼 생각입니다. 시리즈의 완성을 위해선 박해수 씨에게 또 메피스토 역을 제안해 봐야겠죠? 하하”
양정웅(56)연출은 ‘코리올라누스’, ‘한여름 밤의 꿈’, ‘페르귄트’, ‘햄릿’ 등 서양 고전을 현대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재해석해 주목받아온 연출가다.
그가 공동각색하고 연출한 ‘파우스트’가 여러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연극 예매 1위를 기록하며 인기를 끄는 데에는 악마 ‘메피스토’ 역으로 출연하는 박해수의 힘이 적지 않다.
‘오징어게임’, ‘수리남’ 등에서 보여준 인상적인 연기로 세계 무대에서도 통하는 배우임을 입증한 그는 5년 만에 친정인 연극 무대로 돌아와 매력적인 외양으로 활개 치는 이 시대의 ‘악’의 모습을 열연 중이다.
13일 LG아트센터서울에서 만난 양정웅 연출은 “박해수는 매체로 진출하기 전에도 연극계에서는 이미 대스타였다”면서 “오래전부터 같이 일해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함께하게 됐다”고 했다.
“전에 무대에서 봤을 때부터 박해수에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에너지와 아우라가 있었어요. 대사 처리도 정확하고 표현법도 다양하고 능수능란하지요. 이번 파우스트도 처음부터 박해수를 생각하고서 준비했어요.”
교언영색(巧言令色). 박해수의 ‘메피스토’는 재치 넘치는 달변과 화려하고 당당한 제스쳐와 여유로 단숨에 무대와 객석을 사로잡는다. ‘박해수를 위한 연극’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대에서 그의 카리스마와 에너지는 절대적이다.
양정웅 연출의 ‘파우스트’는 이제 첫발을 뗐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쓴 원전을 연극으로 만들면 분량이 스무 시간이 훨씬 넘지만, 이번에 무대에 올린 건 원작의 1부를 절반가량으로 압축한 일부분이다. 양 연출은 “파우스트 전체를 다 하려면 2부, 3부까지는 만들어야 할 것 같다”면서 그때도 ‘메피스토’를 박해수에게 맡기고 싶다고 했다.
박해수뿐 아니라 ‘파우스트’에는 출중한 연기력으로 뒤를 받치는 조연들의 활약도 돋보인다. 젊은 파우스트 박사가 사랑에 빠진 ‘그레첸’ 역의 원진아도 그중 하나.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을 비롯해 TV 드라마와 영화에 주로 출연해온 그는 처음 도전하는 연극 무대에서 열정적인 연기로 깊은 인상을 줬다.
“연극은 파이팅이 있지 않으면 쉽지 않은데 원진아는 정말 파이팅이 넘쳐요. 어떻게 하면 연극적인 연기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악바리처럼 합니다. 조언을 해주면 그걸 어떻게 해서든 또 해내고 말아요. 언젠가 연습하면서 ‘너는 이미 연극배우야’라고 말해줬습니다.”
무대에서 기본기를 쌓은 배우들이 TV와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영화로 진출해 인지도를 높이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뒤 다시 연극으로 돌아와 무대에 서는 건 연극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나 미국 할리우드, 브로드웨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박해수도 그렇고, 한국도 요즘에는 이런 배우들이 꽤 많아졌다.
“무대 위에서 치유한다고들 해요. 그냥 한 번 찍고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달, 석 달, 대본 숙지 기간까지 하면 몇 개월을 자기 연기를 갈고 닦는 거잖아요. 그런 시간이 배우들에게 분명히 치유와 집중의 시간을 주는 것 같아요. 고무적인 일입니다.”
연극은 물론, 양정웅은 뮤지컬과 오페라, 미디어아트를 넘어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등 대형 이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연예술을 연출해왔다. 그에게 연극 무대는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곳이다.
“음악을 좋아해서 뮤지컬 연출이나 오페라 연출을 하면 귀가 즐거워 행복해요. 그런데 본업인 연극은 즐거우면서도 괴롭죠. 연극이 영어로 논다는 뜻의 플레이(play)잖아요. 제가 지루한 걸 싫어해서 놀이하듯 작업을 하는데, 그러고 귀가하면 또 고민하느라 머리를 싸맵니다.”
‘파우스트’는 괴테가 선과 악, 신과 인간, 사랑과 욕망, 구원 등 평생에 걸쳐 씨름한 철학적 문제들을 연극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대작이다. 그렇다고 3시간에 가까운 상연 시간이 온통 진지한 고뇌로만 채워진 건 아니다.
양 연출이 배우 남윤호(배우 유인촌의 아들)와 함께 각색한 ‘파우스트’는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곳곳에 깨알 같은 재미를 집어넣었다. 박해수가 ‘수리남’에서 했던 유명한 대사도 각색 단계에서 넣었는데, 배우들이 리허설하는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추가하면서 더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가 밝힌 연출의 변에서 “이 연극을 보고 나서 쉽게 읽히지 않는 그 유명한 고전 ‘파우스트’가 쉽게 읽히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이 관람 후 남다르게 다가왔다.
숏폼(짧은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 호흡이 긴 글을 좀처럼 잘 읽지 않는 이 난독(難讀)의 시대에 우리가 고전을 계속 읽고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석 같은 지혜들이 고전에 다 들어있지요. 지금 흥행하는 콘텐츠들도 따져보면 고전의 드라마들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상투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고전에는 문화, 언어, 공간을 뛰어넘어 통하는 진리, 인간의 본질을 직시하는 지혜가 담겨 있어요. 계속해서 거울처럼 고전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LG아트센터와 샘컴퍼니가 공동제작한 ‘파우스트’는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서울 LG시그니처홀에서 29일까지 공연한다.
김복두 itn@itn.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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