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빠삐용’ 탈북난민인권연합회장 “탈북민 소식 끊기면 신속 대응해야”
“2019년 탈북여성 모자 아사 사건 이후로도 지난 4년간 정책적으로 달라진 점이 없다.”
지난 11일 오전 김용화(70)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은 서울 강동구 길동 건물 지하의 사무실에서 만나 이같이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서울 양천구에선 보건복지부·지자체·통일부 세 기관의 복지 사각지대에 방치된 40대 탈북민이 백골 상태 시신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탈북 모자를 중국에서 데려왔던 김 회장은 “탈북민들에게 정보가 원활하게 전달되도록 정부가 탈북자 단체를 하나로 연결해줘야 한다”며 “소외된 이들의 소식이 끊겼을 때 빨리 대응할 수 있는 체계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소외되고 위축된 탈북민의 외부 활동을 유도하기 위해 탈북난민인권연합은 2012년부터 매달 2회씩 ‘사랑과 희망 나눔행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날도 단체 사무실에선 50여명의 탈북자가 찬송가를 부르고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한 뒤 농마(녹말)국수와 가줄(전통과자), 낙지자반(오징어무침) 등 북한 음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
18년째 김 회장은 이 단체를 이끌고 있다.
다음은 문답.
— 탈북 동기와 과정을 말해달라.
▲ 사회안전성(경찰청) 철도보안국에 근무했는데 1988년 7월 러시아에서 평양으로 가던 군수열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열차 호송 책임자인 내가 당성 부족으로 동지재판(동료들이 죄를 묻고 처단하는 행위)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자 중국으로 탈출했다. 중국 옌지에서 11개월간 걸어서 선양, 톈진, 쿤밍을 거쳐 베트남 하노이까지 갔다. 베트남 하이퐁항에서 한국 무역선에 오르려다 체포돼 2년간 수감된 뒤 북송 직전 탈옥했다. 라오스로 밀입국했다가 체포돼 9개월 수감된 뒤 탈출해 중국 산둥성 하이양현으로 갔다. 한국인 지원으로 0.3t짜리 쪽배를 산 뒤 18일간 노를 저어 1995년 6월 25일 태안에 도착했다.
— 한국에 도착한 후 생활은 어땠나.
▲ 위조 중국 신분증 때문에 24차례 재판에도 탈북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3년간 서울구치소, 성동구치소 등을 전전했다. 1998년 보석으로 나와 신원보증을 해준 국회의원 건물에서 거주했는데 경찰관 17명이 잡으러 와서 차를 후진해 뚫고서 명동성당까지 갔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보호해 주고 수녀들이 자금을 지원해줘 진도로 가서 그해 4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 한국 국적은 언제 취득했나.
▲ 일본 오무라수용소에서 3년간 옥살이를 했지만, 변호사 4명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갖게 됐다. 일본에서 ‘아시아 빠삐용’으로 소문났다. 일본인 2천400명이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게 탄원 편지를 써 한국 입국이 허용됐지만 공항에 내리자 중국 한족으로 분류됐다. 김 추기경의 소개로 나를 알게 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2001년 의원들을 통해 중국 당국으로부터 탈북자 증명원 등을 받아왔다. 덕분에 국회에 가서 드디어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 탈북 이후 가족들 소식은 들었나.
▲ 가족들이 요덕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부인과 세 아이. 세 누나, 남동생 모두 살던 지역에서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용서가 안 된다.
— 과거 횡령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받았는데.
▲ 2015년 횡령 사건이 터지고 실무자가 내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2019년 징역 1년을 살았다. 그러나 회원들은 당시 실제 횡령한 실무자한테 내가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회장직을 유지하는 데 모두 동의했다.
— 어떤 계기로 단체를 설립했나.
▲ “받은 만큼 돌려주라”는 김 추기경의 말씀을 듣고서 ‘다시는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탈북자동지회에서 만난 홍순경 이사장과 중국에서 떠도는 탈북자를 적극적으로 살려보자는 취지로 2005년 5월께 탈북난민인권연합 전신인 ‘탈북난민인권협회’를 설립했다.
— 그동안 탈북자를 몇 명이나 구출했나.
▲ 약 6천명의 탈북자를 구출했다. 평양시 인민위원회 생산지령 처장(서울시 부시장급) 출신으로 중국에서 외화벌이하던 북한 주민을 데려온 게 기억에 남는다. 중국으로 팔려 갔다가 병에 걸리자 버려진 여성을 현지에서 6개월간 치료한 뒤 한국에 데려왔다. 현재는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아가고 있다.
— 탈북민의 정착에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 있나.
▲ 서울시가 탈북민 임플란트 치료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근에서야 알았다. 우리 등록회원이 1천300명에 달하지만, 작년 파주에서 열린 남북하나재단(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체육대회 공문을 아무도 받지 못했다. 정부와 남북하나재단, 지자체, 탈북단체들이 수시로 만나며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탈북민의 고충을 듣고 해결해줄 수 있는 법률자문단 등도 시급하다. 독신으로 사는 탈북민이 아프거나 사망했을 때 방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와 탈북민 단체가 함께 빨리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 2019년 탈북여성 모자 아사 사건 이후 대책이 마련됐나.
▲ 탈북여성이 굶어 죽기 2~3개월 전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았는데 구청에서는 (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지원이 안 된다고 했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사건 이후 달라진 점을 체감할 수 없다. 오히려 사건 이후 남북하나재단과 통일부 정착지원과 간 소통 과정이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졌다. (다른 탈북자들은 하나원 교육 이후 재단이 정착을 지원해 주는데 얼마 지나면 딱히 정보를 주는 건 없다고 말했다.)
— 최근 약 6년 만에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통한 가족 단위 탈북이 이뤄진 배경은 뭐라고 보나.(지난 18일 추가 질문)
▲ 황해도와 강원도 상황이 최악이기 때문에 해안가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넘어오는 것 같다. 북한이 바로 붕괴하지는 않겠지만 본격적인 탈북 재개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본다.
김태우 itn@itn.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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