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종 영장류 게놈 분석해 질병 유발 가능성 있는 유전체 포착
멸종위기 영장류 보호도 기여 기대…높은 유전적 다양성 확인돼
수백종 영장류의 DNA 유전 정보(게놈·유전체) 서열을 분석해 인류의 질병 가능성, 종의 기원, 그리고 멸종 위기에 놓인 영장류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인공지능(AI)을 통해 유전체 속에 담긴 잠재적인 질병 원인을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3일 학계에 따르면 국제 과학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는 손바닥 만한 쥐여우원숭이부터 수백㎏에 달하는 고릴라까지 수백종이 넘는 영장류의 게놈 서열을 분석한 논문이 게재됐다. 연구팀은 영장류 게놈 서열들로 AI를 학습시켜 인간의 유전자 변형이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하고, 영장류 진화의 복잡성에 대해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233종 영장류의 유전체 샘플 수집…AI 기반으로 유전체 변종의 질병 유발 가능성 분석학계에서는 20년 전인 2003년 인간이 갖고 있는 염색체 내 모든 염기서열을 밝힌 이후 꾸준한 추가 연구를 통해 질병의 원인 혹은 치료 방법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무수한 변형 유전체를 발견해왔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유전학만으로는 이같은 변종들이 의학적으로 관련이 있는지를 구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연구팀은 동물원에서 사육 중인 영장류부터 야생 영장류까지 233종의 영장류 가운데 800마리 이상 영장류들의 혈액 샘플을 수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확인된 지구 상의 영장류는 인간을 포함해 약 500여종인데, 절반에 가까운 영장류의 게놈을 분석해낸 셈이다.
이번 연구는 다른 영장류 종(種)들에게서 유사한 변종을 발견함으로써 보다 확실한 의학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 하에 진행됐다. 영장류와 인간은 DNA를 약 90% 이상 공유하고, 일부 영장류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는 인간에게서도 높은 확률로 나타난다. 반대로 영장류에서 발생할 유전체 변이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인간에게서도 질병을 일으키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같은 영장류 게놈 탐구는 종 내, 혹은 종 간의 개별적인 DNA 기반 변형인 ‘단일염기서열 다형성(SNP)’를 포착할 수 있게 해줬다. SNP는 인간 유전체 상에서도 가장 많이 존재하는 형태의 유전자 변이다. 불특정 다수 유전체의 같은 위치에서 특정 염기서열 1개가 다른 염기로 변화돼 다른 형질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의 DNA 염기서열은 99.9% 이상 동일하지만 이 0.1% 차이에서 머리색·키·피부색·체질 등 차이가 나타난다. SNP는 이같은 외형적 차이 뿐만 아니라 특정 질환에 대한 감수성, 질환 발현 양상, 치료제 반응성 등에서 차이를 나타나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팀은 이번 영장류 게놈 탐구를 통해 단백질 아미노산 서열을 바꾼 430만개의 SNP를 발견했다.
이렇게 발견된 SNP에 대해서는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하고 있는 단백질 구조 파악 생성형 AI ‘알파폴드’를 기반으로 한 ‘영장류 AI-3D(Primate AI-3D)’프로그램을 통해 질병 원인 가능성이 있는지 분석이 이뤄졌다.
연구팀은 영장류 SNP로 AI를 훈련시켜 해당 SNP가 유해할 지 여부를 판단하게 하고, 다시 영국 바이오뱅크에 저장된 45만4712명 인간의 데이터와 대조해 유해한 유전자가 있는지를 식별하도록 했다.
아울러 연구팀은 AI로 하여금 그간 질병과 잠재적으로 연관이 됐을 것으로 예상된 인간 유전체와 AI의 SNP 데이터베이스를 대조시켰는데, SNP의 단 6% 만이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같은 발견을 통해 향후 사람의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유전체 변종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잠재적인 약물 치료 등의 표적으로 삼아 효과적으로 치료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영장류 게놈 분석은 이처럼 인간의 질병 원인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멸종위기의 영장류를 보존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팀이 샘플을 채취한 영장류들 중에서는 빠른 속도로 멸종하고 있는 종들이 많았다. DNA에 기록된 유전적 다양성은 얼마나 많은 개체들이 현재 그 종 내에 생존해있는 지를 알려준다. 이를 통해 특정 종의 멸종 속도, 멸종 시기 등까지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연구대상이 된 모든 영장류 가운데 단 15종을 제외한 모든 종들은 여전히 인간보다 더 높은 유전적 다양성을 갖고 있었다. 같은 종 내 번식만 이어질 경우 유전적 다양성이 좁아지지만, 영장류 내 다른 종 간 번식이 이뤄지면서 유전적 다양성이 커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잡종 영장류들의 등장으로 유전적 다양성이 커지는 것에 대해 연구팀은 인류의 진화와 잠재적인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수만년 전 현생 인류와 데니소반인, 네안데르탈인 등 다양한 유인원들 사이에 종 간 혼합이 발생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연구팀은 최근 영장류들의 유전적 다양성이 높아지는 것을 두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에든버러대학과 웁살라대학의 진화 생물학자인 카테리나 구샨스키는 “영장류 멸종은 인간의 서식지 파괴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종 간 혼합이 너무 최근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종의 다양성을 낮추기 위해 동종 번식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개체 수 감소가 너무 빨라서 유전학이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다만 유전적 다양성이 각 종의 탄력성을 높이고 생존력을 높여줄 수 있는 만큼 이같은 발견은 고무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연구팀은 “유전적 다양성의 확대는 우리가 아직 영장류 멸종이라는 상황을 되돌릴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복두 itn@itn.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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