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과 위기 속 제1회 ‘노키즈존’ 학술대회에 의사들 몰려
“통장 헐어가며 병원 유지했지만…충분한 보상 주어져야”
“보톡스 시술이 병원 수입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배우러 왔어요. 성인 만성질환에도 관심이 있고요.”
서울 구로구에서 소아청소년과(소청과) 개원의로 일하는 A 원장은 11일 서초구 더케이호텔에서 열린 소청과 학술대회에 참석해 ‘진료실에서 바로 적용하는 보톡스 핵심 포인트’ 강의를 들었다.
어려워진 병원 사정을 타개할 방책을 찾기 위해 이날 행사를 찾았다는 A 원장은 “당분간 소아청소년과를 계속 운영하겠지만, 보톡스 시술이 수입에 큰 도움이 되면 소아청소년과 간판을 내릴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가 주최한 것으로, A 원장처럼 미용 시술이나 성인질환 치료법을 배우러 온 소청과 의사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최근 소아청소년과 ‘위기’ 상황 속에서 운영난을 겪는 소청과 개원의들이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인데, 소청과의사회는 이날 행사에 회원 719명이 등록했고, 약 570명이 실제로 참석했다고 밝혔다.
주로 개원의들이 회원인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는 지난 3월에는 “지난 10년간 소청과 의사들의 수입이 28%나 줄어들어 병원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며 소아과 ‘폐과 선언’을 하기도 했다.
‘소아청소년과 탈출(No kids zone)을 위한 제1회 학술대회’라는 주제에 걸맞게 이날 행사에선 소아, 청소년과 관련된 강연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1타 강사님이 족집게 강의하는 고지혈증 핵심 정리’, ‘일차의료기관에서 관리 가능한 당뇨의 진단과 관리’, ‘성인 천식의 진단과 치료의 실제’, ‘진료실에서 바로 적용하는 보톡스 핵심 포인트’ 등 성인 만성질환이나 피부·미용 시술에 관한 강연으로 구성됐다.
행사 인사말에서 소청과의사회 임현택 회장은 “우리는 아이들을 좋아해서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됐지만, 현재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우리 과를 운영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부득이 이러한 내용의 학술대회를 기획하게 됐다”며 “내년에는 ‘소청과 탈출’이 아닌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진료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학술대회를 열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인플루엔자 등 계절성 호흡기환자가 대부분인 소청과 환자 수가 코로나19 유행 기간 크게 줄고, 저출산으로 미래 전망마저 밝지 않자, 소청과를 떠나는 의사들이 늘고 있다.
지난 4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건의료빅데이터개방시스템의 표시과목별 의원 수 현황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말 기준 전국 의원 수는 3만5천225개로 약 10년 전인 2013년 말(2만8천328개)에 비해 6천897개(24.3%) 늘었지만, 소청과는 2천200개에서 2천147개로 53개(2.4%) 줄었다.
심평원의 의원 표시과목별 진료인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 사이(2017∼2021년) 소아청소년과 진료 인원은 24.6% 줄었다.
이러한 사정 탓에 소청과 의사들의 소득은 23개 임상과 중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복지부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의원급 의사의 연평균 소득은 약 2억5천442만원이지만, 소청과 의원은 1억875만원으로 가장 적다.
상대적으로 적은 수요와 수익은 의원 개원 감소뿐만 아니라 전공 기피로도 이어져 상급병원에서 소청과 진료 공백이 현실화하고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2013년 97.4%였던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충원율은 올해 상반기 16.3%로 떨어졌다.
소청과 의사들은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소청과 업무 외 다른 진료를 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동탄에서 10년 차 개원의로 일하는 B 원장은 “코로나19 유행 동안 통장을 헐어가면서 병원을 유지했다. 앞으로 계속 소아, 청소년 환자가 줄어들 테니 다른 과 공부는 필수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며 “피부, 미용, 성인질환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배울 생각이다. 소아청소년과를 유지하려고 다른 과 공부도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주에서 연합소아과를 운영 중인 C 원장은 “당장 10년 뒤에 소아 환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소아 환자들에게 무엇을 더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시간에 다른 것을 배울 수밖에 없다”며 “충분한 보상이 주어질 때 의사도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고 환자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복두 itn@itn.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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