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한길사 창립…47년 출판 외길 인생
‘해방전후사의 인식’· ‘로마인 이야기’ 등 기획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 184번째 출간 뚝심
한길사 김언호(78) 대표는 47년간 출판 외길 인생을 걸어온 이 시대의 ‘출판계 어른‘이다.
“왼편에 독자들이 있다면 오른편에는 저자들이 있어요. 그런 수평적 연대 속에 출판계가 지금까지 유지돼 온 거죠.”
1976년 한길사를 창립하고 50년 가까이 출판사를 이끌어 온 그는 한국 출판의 부흥기와 위기를 모두 통과했다. 한국출판인회의를 창설하고 1·2대 회장을 맡았고 이후에는 동아시아출판인회의를 조직하고 제2기 회장을 역임했다.
편집자이자 기획자로 더 큰 두각을 드러냈지만 그는 작가이기도 하다. 1980~90년대에는 ‘출판운동의 상황과 논리’ 등 출판계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책을 집필했다. 최근 출간한 ‘김언호의 서재 탐험’도 마찬가지다. 이번 책으로 ‘책 4부작’을 완성한 그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해 12명의 우리 시대 독서가를 만나 그들의 서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경기 파주시 한길사 사옥에서 만난 김 대표는 여전히 ‘책의 세상’에 푹 빠져있었다.
“저는 ‘송뢰’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불면 들리는 은은한 소리가 마치 책과 같다는 생각이 요즘 더 많이 들어요. 책이 참 그 자체로 아름답구나, 보기에도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1980년대는 금서의 시대였다. 그러나 출판인들과 책들이 권위주의 권력과 싸우던 시대였다.” (‘김언호의 서재 탐험’ 본문 중)
김 대표는 1980년대를 “위대한 책의 시대”로 기억한다. 동아일보에서 1975년 해직된 그는 이듬해 호기롭게 출판사를 창립했고 외압 속에 퇴직당한 교수와 기자 등 수많은 이들이 출판계로 몰렸다. “1980년대는 민주주의 운동 사회에 굉장히 중요한 시대이고 그 시대는 책과 함께 움직여 갔다”고 회상하는 그에겐 향수가 남아있다. “세미나와 스터디 등이 책에서 시작됐어요. 모든 젊은이가 가방을 들었고 가방 속엔 책이 들어있었죠.”
당시 한길사에서 진행한 역사·문학 기행은 그가 자신의 출판 인생에서 꼽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송건호, 리영희 등 한길사와 함께한 내로라하는 필자들과 독자와 함께 한 기행은 “살아있는 정신과 이론을 찾아 현장으로 찾아간 잊지 못할 시간”들이다.
“지금은 힘들겠죠.”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답은 “책을 읽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이들에게는 짧은 정보가 익숙하지만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사고와 책이 다루는 문제 의식이 현재에도 유용하다는 생각이다.
“어렵겠지만 책을 정말 좀 읽었으면 좋겠어요. 1980년대부터 다뤄왔던 시대정신은 지금도 유효하거든요. 도덕적이고 정의롭고 민주적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나 우리 인간이 과학을 어떻게 선용해야 할지 같은 것 말이에요.”
세계 서점 기행을 다니며 후배 편집자에게는 “베스트셀러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꾸짖기도 하는 한편 젊은 세대가 스마트폰만 들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워 한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큰 책을 만들기도 했다. 그만큼 그에게 최근의 독서 문화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 대표의 이러한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한길사는 현대에 필요한 사상과 사고를 담은 책을 지속해서 출간하고 있다. 1996년 출간을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온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한길그레이트북스의 184번째 이자 최신작인 ‘역사를 바꾼 권력자들’은 영국 출신의 저명한 히틀러와 나치 독일 연구자인 이언 커쇼의 저서다. 결코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는 책이지만 김 대표는 “지금 우리가 어떤 생각을 사유해야 하고 사회는 어떤 지향과 철학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뚝심있게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다.
“당연히 작은 출판사라면 ‘한길그레이트북스’ 같은 시리즈는 못 낼 거예요. 저희도 정말 어떤 책은 굉장히 안 나가 괴롭습니다.”
지금 출판사가 그럼에도 인문과학저서를 낼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책들이 존재한다. 1980년대 대학생이라면 읽어보지 않은 이가 없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 스테디셀러 ‘로마인 이야기’가 바로 그 “고마운 책”들이다. “그런 고마운 책들 덕분에 팔리지 않는 책도 만들 수 있었어요.”
1980년대 후반부터 파주 출판도시 건설에 참여했고 1990년대에는 예술인마을 헤이리를 구상했지만 그에겐 여전히 아이디어가 가득하다. 과학기술자처럼 전문 편집자를 국가에서 육성해야 한다는 구상부터 도서관에서 인문과학저서를 1000권만 구매해줘도 인문서 출판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까지 인터뷰 내내 그는 출판계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늘 어렵지만 늘 즐겁습니다. 다음은 우리 시대에 중요했던 저자들에 대한 강연을 진행할까 합니다.”
김복두 itn@itn.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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